무더위 여름이 기승을 부린다. 잠시 더위를 피해 동네도서관으로 대피 후 책을 그늘 삼아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책장 사이를 기웃거리다 겨울엔 따스하고, 여름엔 시원한 마법의 단어 '시골'이 포함된 에세이 한 권을 발견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시골 by 박정미 작가 (출판사 스토리닷)
벌써 7년이나 됐다는 박정미 작가의 시골생활기를 보면, 내 기억 속 고이 간직했지만, 어느새 흐릿해진 시골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겠다 싶어 집어 들었다.
시골 책방 운영자 박정미
대구 출신 처자가 연고도 없는 전라북도 순창군에 무작정 내려가 농사짓기 시작한 지 어언 7년 차, 아예 한발 더 나아가 책방까지 열었단다. 시골이 싫어 도심지에 정착했다는 부모님 슬하에서 평생을 도시민으로 살아온 평범한 사람이 어떤 심경의 변화로 이런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일까.
사실 그녀는 시골행 결심 전에 이미 전조현상을 보였다. 서울특별시 아무개처럼 회사 일에만 치이다 보니 자신을 위한 일상을 위해 회사로부터 먼 동네로 이사를, 그것도 여러 번 했다. 때론 좋은 원룸을 구했음에도 일찍 퇴근 날엔 바로 외출하기 일쑤였다. 원룸에 머무는 시간도 적고 이사도 빈번하게 한 탓에 "동네 친구도, 단골 가게도 만들지 못했다"라고 작가는 말한다.
이래 저래 팍팍한 도시의 삶을 핑계 삼아 최소 한번은 여유롭게 시골살이 할 운명이었다.
그녀가 시골을 떠난 첫번째 이유 : 빡빡한 도시 일상
(도시에선) 출근 거리가 30만 가깝기를, 1시간 편히 점심을 먹을 수 있기를, 잠시 눈이라도 붙일 수 있는 딱 5분만 더 있기를 바랐다. 분 단위로 시간을 세며 살아왔는데 시골의 삶은 그렇지 않았다. 시간은 없고 계절이 있었다. 시간을 셀 틈도 없이 철이 돌아왔고, 철마다 먹어야 할 것, 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제철 채소를 먹기 위해 작물을 심고 거두기에 바빴다. 냉이를 시작으로 봄을 먹다 보면 여름이 와서 과일과 옥수수를 먹고 주변에 감과 밤이 많아진다 싶으면 가을이었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겨울이 왔고, 쉴 수 있는 계절에 즐거웠다.
도시 직장남녀들은 모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출퇴근 지옥철, 눈 깜짝할 새 스쳐지나가는 월급통장 같은 점심 1시간 등 하루하루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른다. 그 고되고 정형화된 생활 패턴을 조금이라도 바꾸고자 틈틈이 맛집과 핫플을 검색한다. 근데 이상하리 만치 맛있는 먹어도, 좋은 걸 봐도 마음은 반비례하게 헛헛하다.
그래서 삶의 변화를 주고자 이사한다. 좀 더 용기가 있다면 아예 직장에 사표 쓰고 시골행을 택한다. 환경이 바뀌면 생활방식이 바뀐다. 도시 삶에선 볼 수 없던 새로운 본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박정미 작가는 아침이 생겼다.
밤을 좋아해서 아침잠이 많은 편이다. 키가 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밤에 있다고 한 신해철의 말에 백 번 동감하며 일찍 잠들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는 밤이 새도록 말할 수 있다. 복잡한 세상을 까맣게 지우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되는 시간. 하늘의 달과 별조차 밤의 고요함을 깰까 조용히 반짝거리기만 하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밤은, 밤은 왜 그리도 짧은 걸까.
그렇게 긴 밤을 길게 써보아도 어김없이 아침은 제시간에 도착한다. 신경을 자극하는 알람이 울린다. 아침은 당연히 거르고 얼른 가방을 들처 메고 대문을 박차고 나선다. 따릉이 QR코드 잠금 해제 후 대중교통까지 내달린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내 영혼은 여전히 숙면인 상태다.
박 작가는 시골에 내려온 후 저절로 눈이 떠졌단다. 그것도 새벽에.
그녀가 시골을 떠난 두번째 이유 : 느림의 미학
저자의 말마따나 시골의 시간은 도시의 시간과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스카치테이프 한 개 사려면 차를 타고 30분을 가야 해요." 어느 방송에서 조명한 제주살이 1년 차 출연자 에피소드의 엔딩은 결국 서울로 가는 이삿짐을 싸는 것으로 귀결됐다. 만만치 않은 시골 정착기를 보여준 다큐멘터리였다. 서울에서 스카치테이프는 내겐 이름조차 불리지 않는 건조한 문방 도구에 불과한데, 제주도에선 어느 이의 삶의 경로까지 뒤흔들만한 효과를 발휘하는 아이템이다.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운동 상태나 중력의 크기에 따라 시간은 상대적으로 다르게 흐른다고. 중력이 클수록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는 것이다. 시간이 늦게 흐르는 시골에선 당연히 작은 것도 크게 느껴진다. 삶의 중력이 크게 작용한다. 도시에선 거들떠보지도 않던 스카치테이프의 유무가 한적한 시골에선 빅뱅급 대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
도시와 시골의 시간이 다른 속도로 흐르기 때문이다.
"어디가?"
"알배추 사러, 저녁 반찬 해 먹게."
"그래? 그럼 나도 하나 사다 줘, 오늘은, 나도 배추쌈이나 먹어야겠어."
두 집의 저녁 반찬거리를 사러 가는 길이 되었다. 걸음이 아깝지 않다. 작은 시골 마을이다 보니 어디를 가든 멀다. 먼 거리다 보니 몇 번 걸음 할 일을 한 번에 모아서 간다. 읍내 가는 길에 학원 가는 아이들이 있으면 같이 태워서 가고, 들어올 땐 또 들어오는 길이라 함께 타고 온다. 세탁소에 옷을 찾으러 갔다가 옆집 언니의 이름이 붙여진 옷이 있으면 대신 찾아오기도 한다. 읍내로 출퇴근하는 이웃은 괜히 퇴근길이 아깝게 느껴질 때 한 번씩 함께 먹을 피자나 떡볶이, 족발 같은 안주를 사 오기도 한다. 여러 사람의 시간을 함께 모아 쓴다.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 한 번 걸음에 여럿이 함께 움직이니 나눌 이야기도 쌓인다.
도시의 편리함이 시간을 줄여주는 데 있다면, 시골은 불편함이 오히려 시간을 채우게 만드는 것이지 않을까.
박정미 작가는 '만약에' 그 다큐 출연자가 "스카치테이프 하나를 이웃에게 빌릴 수 있었다면 생활이 또 달라지지 않았을까요"라고 자못 아쉬워했다. 7년 차 정착민으로서 팁을 공유하자면 시골의 불편함 결국 사람으로 채워야 한다는 거다.
그녀가 시골을 떠난 세 번째 이유 : 결국은 사람
도시가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참 많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대중교통, 24시간 편의점, 그리고 병원까지, 하루 24시간도 빠듯한 도시민의 시간을 압도적으로 절약시켜 준다. 그 절약한 만큼 폭발적으로 다활동하는 것도 도시민이다.
도시 아파트 '안'에서만 사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고 싶어한다. 글쓴이 지인들처럼 아파트 거주자들 중 발코니에 테이블과 의자를 펼쳐두고 맛있는 요리를 해 먹으며 캠핑 기분을 내는 가정이 상당하다. 팬데믹 이후 이런 현상은 더 짙어졌다. 일주일 내내 주말 계획을 짜고 금요일 퇴근하면 바로 짐 챙겨 보금자리를 떠난다.
저자는 도시민의 여행, 캠핑 문화에 대해 "쉬는 것조차 열심히 해야 할까 싶지만, 노는 데에 쓰는 열심은 눈앞에서 바로 즐거움과 뿌듯함을 느낄 수 있으니 안 할수록 손해" 라고 분석한다. 그녀는 과거 도시 직장생활에 대해 "밤낮없이 책상에 앉은 채 무형의 가치를 만들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다" 라고 회상하며, 자기 손으로 직접 가치의 실체를 키워내고 파는 지금의 시골생활을 선호한단다.
도시에선 농촌마을의 생산활동처럼 즉각적인 피드백을 얻기 쉽지 않다. 서비스 종사자가 대다수인 탓도 있다. 그러다 보니 우리가 열심을 다해 쉬고, 보상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보통 도시 밖이나 SNS 세상인 것이다. 시골 사람 다된 작가의 분석력에 무릎을 탁 쳤다. 블로거 활동을 병행 중인 내 모습이 오버랩됐다.
시골에서 배움을 깨닫다.
텃세. 어디나 존재한다. 시골 텃세는 더 심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정착을 위해 내려온 후 시골 집 여기저기 이사해 왔고 책방도 겨우 구한 글쓴이다. 몇 년 간 뜨내기로 살면서 자연스레 동네 이장님들이 적극적으로 빈집 마련에 도움 주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됐는데, 다른 무연고자들처럼 이번 친구들도 언제고 떠날 수 있을 거라 간주했기 때문이란다.
책방을 열고 며칠 지나지않아 손님 한 명이 술에 잔뜩 취해 들어왔다. 그는 비틀대며 의자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한숨을 푹 내쉬며 그가 말했다. "나는 너희가 너무 싫어." 눈앞에서 내가 싫다고 하는 말을 들은 것은 살면서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개업 축하금까지 챙겨서 준 형님이었다. 혼란스러웠다. 놀란 마음을 꾹 누르고 왜 그런지 물어보았다. "너희가 내꺼 다 뺏어가잖아."
즉, 시간이 필요했다는 거다. 어느 한 공동체에 어엿한 일원이 되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 동안 신뢰가 쌓인 관계 형성이 필수다. 한편 상대방 못지 않게 본인 마음의 장벽도 낮출 필요가 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커피도, 책도 다들 가까워지기 위해 먼저 손을 내밀어 준 것인데 참 서툴게도 대했다 싶다. 취향을 핑계로 내 공간에 대한 텃세는 오히려 내가 부리고 있진 않았을까. 먼저 꺼내 준 마음에 경계만 짓지 않아도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을 텐데.
우리 모두는 소실 적 퍼주기를 좋아했다.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는 속담이 있는 민족 답게 공유하는데 인색하지 않다. 박정미 작가도 좋은 것을 나누고, 그 마음을 받으며 좋아하는 누군가를 보는 데 행복을 느끼던 사람이었다. 그러다 직장을 서울로 가게 되면서 호의를 함부로 꺼내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고.
내가 꺼낸 무언가를 받고 의아해하거나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심지어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면서 내 마음을 꺼낼 때는 받는 사람의 마음도, 주고 싶은 내 마음과 같은 무게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나 열심히 배웠던지 나중에 엄마에게 이기적으로 변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면서 어르신들께 이것저것 농사짓는 법을 과정에서, 또 늦은 밤 할머니들 대상으로 한글 수업을 하며 가르치는 과정에서, 박 작가는 도시에서 나이가 먹어가며 도시의 콘크리트 잿빛 마냥 희미해진 '주고받는 마음'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워쩌겄어" 마음으로.
순천 농부들은 자연재해로 벼가 쓰러지고 논이 잠겨도, 가뭄으로 작물이 말라 비틀어질 때도 "워쩌것어, 내년에 더 잘지믄 되제."하고 덤덤하게 태풍과 가뭄과 폭우를 받아들이고 합심하여 쓰러진 벼를 일으키고, 가뭄에 물을 대고, 폭우에 물 길을 만든다고 한다.
사계절을 사는 밭이 있고, 같은 계절을 사는 이웃들이 있기에 난관이 덮쳐와도 함께 버틸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시골』을 읽다 보면 정말 세상이 작아지고, 가까워지는 기분이 든다. 이들이 살아가는 시골은 시간이 아니라 같은 계절을 사는 공동체가 있기 때문이다.
'워쩌'라는 마음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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